계곡물 깊어 눈은 쌓일 겨를 없고, 산은 얼어 구름조차 꿈쩍하지 않는다.
갈매기와 백로가 날아도 구별하기 어렵고, 모래톱과 물가도 분간되지 않는다.
들판 다리 곁엔 매화나무 몇 그루, 온 천지에 휘날리는 하얀 눈발.
(寒色孤村暮, 悲風四野聞. 溪深難受雪, 山凍不流雲. 鷗鷺飛難辨, 沙汀望莫分. 野橋梅幾樹, 竝是白紛紛.)
―‘눈을 바라보며(설망·雪望)’ 홍승(洪昇·1645∼1704)
외딴 마을에 묵으며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마주한 시인.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고 멀리 가까이 삼라만상이 휘날리는 눈발에 덮여 일체를 이룬 듯 백색 천지를 이루었다. 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시인의 섬세한 눈길. 계곡물로 떨어지는 눈발은 물길이 깊어서인지 쌓일 줄 모르고 산 위를 지나다 멈춰선 구름 떼는 추위에 발길이 묶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눈발 속을 나는 새가 갈매기인지 백로인지, 그 아래가 모래톱인지 물가인지 알 수 없고 매화나무에 매달린 게 꽃송이인지 눈송이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다. 흰 눈으로 비로소 한 몸을 이룬 천지는 그리하여 가없이 광활하고 매화향이라도 번져올 듯 더없이 정갈하다. 설원을 향한 시인의 여유로운 정관(靜觀)에 공감한다면 올겨울엔 우리도 한 번쯤 풍성한 백설의 향연을 기대해 봄직하다.
홍승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20여 년이나 과거에 연거푸 낙방하면서 일생 불우한 삶을 산 인물. 그가 남긴 시문이 적지 않지만 대표작은 역시 희곡 ‘장생전(長生殿)’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했으되 현종이 사후 신선이 되어 재회하는 장면까지를 다룬 판타지 연극이다. 한때 이 연극은 선황(先皇) 모독이라는 혐의로 강희제(康熙帝)의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대중의 호응을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