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의 눈.
―황동규(1938∼)
황동규 시인에게는 유명한 작품이 많다. 그중에 ‘즐거운 편지’라는 시가 있다. 제목은 즐거운데 내용은 내내 즐겁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아주 조금 미소 지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황동규 시인의 작품에는 의외의 제목, 생각거리를 툭 던지는 제목,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제목이 많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제목만 보면 나이 어린 청춘의 풋풋하고 달콤한 사랑 이야기인가 싶다. 그런데 전혀 아니다. 달콤은커녕 씁쓸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 이것은 얻으면서 풍족해지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잃어버린 외로움이 가득하다. 시의 배경도 겨울, 그것도 추운 저녁, 성긴 눈이 내리는 때다. 마음이 쓸쓸한데 몸마저 춥다니 그대 잃어버린 빈자리를 확인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다.
왕년에 아픈 사랑 좀 해보았다는 사람만 이 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 작품에는 감정적 공감대 말고 매력적인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시는 많은 말을 담고 있지 않지만 읽다 보면 영화를 보는 듯하다. 마치 내가 시 속의 화자가 되어 추운 겨울 거리를 거닐고, 하늘을 쳐다보다, 떠다니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겨우 13줄일 뿐인데 상상의 필름은 좌르륵 돌아간다. 이 작품이 발표된 지도 벌써 40년이 넘어가는데 오래 기억에 남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