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1964∼ )
자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아포리즘을 남겼는데 “제때 죽어라”는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제때 죽는다는 것은 할 일을 다 하고 인생을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 성공적인 인생의 최종적인 조건인 셈이다. 이렇듯 제때 죽기 위해서는 선행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제때를 ‘사는’ 것이다. 우리는 제때를 알기 어렵고, 지키기는 더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을 살 것인가. 참 힘든 일이다.
밤늦게도 카톡이 울려대서 일을 시킨다. 자야 할 제때와 일할 제때를 알 수가 없다. 바빠서 끼니를 건너뛰니 식사의 제때가 모호해진다. 스트레스에 중독되면 휴식의 제때가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온다. 코로나에 걸려도 일은 해야 하고, 오늘의 혁신이 끝나면 내일의 역량 강화가 기다린다. 이럴 때는 누군가 나를 잠깐 멈추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제때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무엇인가가 우리를 멈추게 해야 한다.
반칠환 시인의 작품에 바로 그 멈춤이 네 번 등장한다. 고작 씀바귀꽃 한 포기가 우리의 질주를 막아낸다. 무심한 제비 한 마리가 우리의 불안을 붙든다. 그리고 속삭인다. 잠깐, 멈춰라. 멈추면 지는 것 같지만, 한 번 멈추면 영영 멈출 것 같지만 시인은 다르게 말한다. 멈춤은 우리를 살게 하고 숨 돌리게 한다. 제때에 멈춰 섰다, 제때에 달리는 삶이 멀어진 시대에 우리는 제때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