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1941∼2022)
이게 전부냐고 묻는다면 전부라고 답하겠다. ‘새봄’이라는 제목을 단 작품이 이것 말고도 더 있지만 각기 다른 작품이다. 9번 작품은 작의 끝번으로 이렇게 네 줄이 전부다. 단시 하이쿠를 떠올릴 정도로 짧다. 옮겨 적기 좋아서 캘리그래피로도 많이 쓰이고 한글 배우시는 할머니들이 따라 적기도 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간결하니 깔끔하구나, 하고 들여다보면 퍼뜩 놀라게 된다. 김지하 시인이 썼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지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황톳길’을 시작으로 ‘서울길’에 올랐다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투사. 그러다 ‘애린’의 연민을 거쳐 생명 사상으로 옮겨간 시인.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던 그의 투쟁기를 떠올리면 ‘새봄 9’번은 의외로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 의외일까. 시인은 말년에 생명 사상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생명을 몹시 사랑했다. 왜 사람이 사람을 잡아가냐고, 왜 함부로 때리고 죽이냐고 화를 냈었다. 시인의 분노 밑에는 사랑과 생명 같은 게 늘 깔려 있었다. 솔이 좋아 벚꽃이 좋다는 이 시에도 사랑과 생명이 중심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 김지하 시인의 시가 맞나? 의아해했다가 아, 김지하 시인의 시가 맞구나, 생각하게 된다.
봄날과 여름날의 경계에서 시인은 떠났고, 봄날과 여름날의 경계인 이 작품은 남아 있다. 시인은 사라져도 남는 것을 남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