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정처럼 깨끗하다
바다는 모른다
모른다 하고
흩어진 폐허가 아직
잔설 같다
그 위로
샘물같이 솟아오르는 만월!
찢어진 날개를
물에 적신다
타는 물줄기를 따라
물을 들이킨다
달빛이 얼음보다 차다,
차다!
―조예린(1968∼)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다.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다.’ 시인 이상이 시 ‘거울’에서 한 말이다. 이상의 시가 대개 그렇듯 뭔가 알고 쓴 듯하다. 때로 시를 읽다 보면 이상의 거울 이야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시는 참 조용한 세계다. 언어로 되어 있으니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청각적 심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속의 소리와 같다. 그래서 시는 언어의 감옥 안에 갇혀 있다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시가 있다. 분명 소리도 색도 나지 않는 흑백의 활자일 뿐인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작품이 있다. 시 속에 역동성도 있고 장면 전환도 있고 소름 돋는 클라이맥스도 있다. 제목은 ‘달우물’. 얼핏 보고 잔잔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시의 화면은 밤바다를 비추고 있다. 폭풍이 지나서 하늘도 바다도 막 고요해지려고 할 때 보름달이 등장한다. 특히 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달이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떠오르면서 달빛을 늘어뜨리는데 그것을 ‘찢어진 날개’라고 표현했다. 내려온 달빛을 통해 달은 물을 마신다. 넓은 바다가 달에 지배되는 모양새가 압도적이다. 그 장면을 보는 독자들도 압도된다.
시는 움직이지 않지만, 시를 읽은 내 마음 안에서는 살아 움직인다. 저 바다도 하늘도 달도 마음에서 그렸다 지울 수 있다. 세계를 나 혼자 만들어 보는 재미, 이것이야말로 시를 읽는 큰 이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