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돈을 가져가 놓고 갚지 않는 사람은 밉다. 미움은 얼마나 힘이 센지 사람의 낯빛을 검게 만들고, 위장을 뒤집어놓고, 잠을 잊게 만든다. 때론 자신이 살기 위해 용서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졌다고 표현하지는 말자. 용서는 미움에 대처하는 가장 지혜로우며 전통적인 태도니까 말이다.
용서란 어렵다. 어려우니까 시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팔랑팔랑 낙엽 같은 시가 날아와 우리의 마음을 식혀 주리라. 이 작품을 쓴 이상범 시조 시인은 팔순이 넘었고 그가 시조를 쓴 세월만도 60년에 가깝다. 그에게 미움이 없었겠는가. 괴로움이 없었겠는가. 노인의 지혜 같은 이 시조는 머뭇거리는 우리의 등을 떠밀어 준다. 놓아주라, 비워내라. 어서 잊고 마음을 씻어내라. 뭐 하나 쉬운 게 없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가을이지 않은가. 나무도 낙엽과 이별하고 열매도 다 익어 떨어지는 가을이란 용서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