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 바다를 헤엄친다/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정채원(1951∼)
혹등고래는 멀리에 있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저 고래는 우리 동네에도 살고 있구나. 가까이에는 이웃집이나 내 안에도 살고 있구나. 고래가 사는 곳을 바다라고 부른다면, 바다는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고래는 새끼를 낳으려고 육천오백 킬로의 바다를 헤엄쳤다고 한다. 나는 새끼를 키우려고 오천이백 일 동안 세상을 헤치고 다녔다. 고래와 우리는 넓고 험한 세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지켜야 하는 존재를 품고 꽤 오랫동안 떠돌았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도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든가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혹등이라는 단어를 ‘마음’ 혹은 ‘영혼’으로 대체해 읽으면 고래와 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제 눈으로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이런 구절은 ‘우리 눈으로 볼 순 없지만 마음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로 바꿔 읽을 수 있다. 혹등을 이해하게 되면 어른 고래가 된다고, 어미 고래는 말한다. 고래도 아는 사실을 우리는 왜 자꾸 잊게 될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소중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