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윤진화(1974∼ )
‘시는 왜 좋은가.’ 이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게 내 직업이다. 그래서 늘 시를 생각하지만 시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세상도, 연인도 싫어질 때가 있는데 시라고 항상 좋을 리 없다. 그런데 이런 시를 발견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어머나!’ 가슴이 쿵쾅대면서 시는 당연히 좋은 거라고 믿게 된다. ‘시는 왜 좋은가.’ 이렇게 물으신다면 내 편, 내 마음이 거기 있어서 좋다고 대답해 드리겠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시 어느 한 구절에서 ‘어? 여기 내 마음도 있네’라고 느끼신다면 당신은 이미 시를 좋아하고 있는 거다.
이제 곧 봄이다. 마흔 번째 봄, 쉰 번째 봄. 사람에게는 수없이 다양한 봄이 있다. 더 많은 봄을 알고 있다는 말은 좀 더 늙었다는 말과 같다. 가장 어린 계절을 늙어가면서 맞이하는 기분이란 상당히 묘하다. 찬란한 여름을 기대하기보다는 잘 늙고 잘 버리고 싶다. 생명 가운데서 죽음을 떠올려 본 사람, 시인과 같은 생각을 해 본 사람에게 윤진화 시인의 ‘안부’는 낯설지 않다. 내 마음을 마치 나인 듯 알고 있는 시가 낯설 리 없다. 세상에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생각을 한 같은 편이 있다는 사실은 사무친 위안이 된다.
본격적인 봄이 되어 더 부산스럽기 전에 안부를 전하자. 좋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 자신에게 인사를 나누자. 사람답게 살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 쓴 시는 안부 인사로서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