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얼룩
기름때
숨어 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김혜숙(1937∼ )
봄인가 했다가 봄이구나 한다. 봄은 코로나가 끝나야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어쩌겠는가. 맞이할 준비가 늦었으니 서둘러야지. 찾아오시는 봄을 바라보는 마음은 절망보다는 희망 쪽이다. 햇볕이 밝은 탓에 자꾸 그렇게 된다. ‘따가운 봄볕에 다 타버려라. 코로나는 모두 모두 소독되어 버려라.’ 이런 희망마저 갖게 된다. 그런데 햇볕에 소독되고 싶은 건 이 시대의 우리만은 아니었나 보다.
오늘은 시대를 넘어 공감할 만한 시 한 자락, 소개해 드린다. 흔히 소개되지 않던, 자주 읽어볼 수 없던 귀한 시. 바로 김혜숙 시인의 ‘빨래’다. 봄날, 진해지는 햇살 아래서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딱인 작품이다.
빨래가 된다는 말을 이렇게 좋게 해석한 경우는 처음 본다. 빨래가 되어 날리고 싶다는 소망도 처음 듣는다. 얼마나 답답하고 찌들었으면 그랬을까. 더러움 싹 빼고, 맑은 물에 헹궈져서, 햇살 아래 하얗고 빳빳하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완전히 새로운 몸은 욕심일 테니 이 몸 그대로, 대신 좀 깨끗하고 당당하게 다시 살아보고 싶다. 알겠다. 그만큼 죽을 것 같았다는 말이다.
마음이 쓰니 몸도 쓰라려 둑방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이 시가 생각났다. 걷고 있는 빨래, 다시 살고 싶은 빨랫감이 바로 나로구나 싶다. 비단 나만 그럴 성싶지 않다. 봄은 일종의 기회요, 좋은 핑계다. 봄이 왔으니 다시 살아봐야지. 다 잊고 내려놓고 살아봐야지. 살 핑계가 하나 더 생겼으니 열심히 살아보자. 봄바람에 마음이 세탁되리라. 새 옷은 못 되어도 하얀 빨래처럼, 깨끗한 빨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