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래도 새들의 나라에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
시가 향 무성한 공동묘지에서
카스트로의 동상에서
이국의 아이들 목소리에서
끊임없이 새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중략)…
혁명 광장을 지키는 독수리떼의 지친 울음소리가
이토록 내 어깨를 누르는 것을 보면
이토록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을 보면
나는 아무래도 새들의 나라에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
4월 초입이 되면 꽃나무와 햇살이 예고한다. 4월 16일, 그날이 돌아온다고. 이런 예고 속에서는 어떤 시를 읽어도 세월호의 슬픔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 까닭은 시가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내가 웃으면 세상도 웃고, 내가 울면 시도 우는 것이 시의 문법이다. 그래서 4월과 무관한 시를 4월과 함께 읽고자 들고 왔다. 이 시는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라는 시집에 들어 있다. 배영옥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 1주기에 맞추어 시집이 나왔다. 그리고 시 ‘나는 새들의 나라에 입국했다’는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 있다.
무심코 읽으면 이 시는 죽음이나 이별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카스트로, 시가 냄새, 찬란한 아침 등이 이별을 연상시킬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시가 세상을 등진 시인의, 마지막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다르게 읽힌다. 이 다른 점을 생각하면 시는 비단 쿠바에 대한 찬사로 읽히지 않는다. 그가 입국한, 혹은 입국할 나라는 아름다운 천사들의 나라다. 이것은 실제 쿠바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시인이 찾아갈 나라로 읽힌다. 이렇게 읽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희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떠난 시인이 새들의 노래 속에 살기를, 4월에 떠난 이들이 다른 어여쁜 나라에 입국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