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 데나를 양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옷을 지어 입으면
등은 따뜻할까요
머뭇대다가 지나친 정거장들이
오늘 별로 뜨면
이제 어떤 먼 곳도 그립지 않을 테죠
발터 베냐민의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베냐민은 천사가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이쯤 되면 철학자 베냐민이 아니라 시인 베냐민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겠다.
역사란 폐허의 폐허라는 것이 베냐민의 명제였다면 인생이란 폐허의 폐허라는 것이 시의 명제이다. 폐허를 바라보고, 간직하는 인간군은 세상에 많지 않다. 돈도 밥도 나오지 않는 먼지 더미를 누가 사랑하겠는가. 예외란 흔치 않다는 말. 오늘 소개하는 시 역시 흔치 않은 폐허의 산물이다. 이승희 시인의 ‘종점들’이라는 작품인데 제목에서의 종점이 그저 그런 버스 종점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이곳은 마음의 종점, 인생의 종점, 애씀의 종점쯤에 해당한다. 이승희 시인은 원래도 폐허의 세계에 몹시 가까운 이다. 따뜻한 허무가 언어의 옷을 입는다면 바로 이 시인의 작품이 될 것이다. ‘종점들’에서도 그러하다. 부스러지기 위해 멀리 떠나서, 부스러지기 위해 고요히 앉아서, 부스러지기 위해 조용히 웃는 그런 시다.
폐허는 유미주의적이며 애상적이고 위험하다. 일상의 낱낱에서 폐허를 보는 시선이 아름다움과 멀 수 없다. 베냐민과 시인이 이미 알고 있었듯이 폐허는 종종 사람을 집어 삼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