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 운동화 ―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그래서 시에 대한 이론을 만들려는 시도도 많았다. 그러나 ‘시는 무엇이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수가 인정하는 소수의 이론가들이 있다. 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스위스 문예학자 에밀 슈타이거다. 그에 따르면 시는 ‘기억을 가지고 만드는 장르’다. 개개인의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시를 쓴 사람 한 명뿐이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차표 운동화를 모른다. 시도 운동화도 시인의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다. 내 속에서도 시의 마음 조각조각이 찾아진다. 다 큰 언니를 좋아하던 마음, 운동회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기억, 의지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 북적거리는 운동회에서 서러웠던 느낌. 시를 읽다 보면 다알리아 꽃밭에서 펑펑 울던 여자아이의 눈물이 내 것인 양 느껴진다.
시는 분명 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에서 시작된다. 시작이 그럴 뿐이다. 남모를 추억은 내게로 날아와서 나만 아는 추억의 문을 열어준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얼굴 모르는 당신의 추억이 내 추억을 일으켜 세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