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모든 시에는 주인이 있다. 주인은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작품에 따라서도 달라지니 누구 하나를 주인이라 특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대개는 지식인 혹은 귀족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시라는 것은 대개 ‘한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한자를 섭렵하고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오랜 시간 연마를 거듭한 사람들만이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말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시의 주인은 점차 늘어갔다. 일제강점기 아름다운 우리말로 몰래몰래 시를 쓰던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를 쓰는 주인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시에 담기는, 시를 읽는 주인들도 늘어났다. 나아가 시의 주인은 더 많아야 옳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이가 시에 담겨야 할 주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1970년대 민중의 서정시 창작이 그런 사례였고 김명수 시인도 이때 등장했다.
시인은 실제의 우리와, 우리의 삶과, 삶의 터전에 대해 시를 썼다. 그는 시를 아주 많은 주인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이 시의 주인으로는 우리,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봄, 우리나라의 봄에 피는 꽃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뿐일까. 서러운 꽃 이름을 지어주며 살았던 조상들도 시 안에 들어 있고, 아픈 꽃 이름 부르며 봄을 기다리던 마음들도 시 안에 들어 있다.
꽃은 단순히 꽃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이고, 역사이며, 희망이다. 서럽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꽃이 일제히 피기 때문에 비로소 봄이 올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봄에는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