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질문은 하나인데, 대답은 수만 개다. 대답을 푸는 과정 역시 수천 가지다. 이 질문 앞에 서면 우리는 몹시 작아지고 불안해진다. 어떻게든 답을 알아야 살 것 같다. 그래서 종교에 묻기도 하고, 신께 여쭙기도 한다. 사랑에 기대기도 하며 철학이나 마음을 헤젓기도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어디엔가 답이 존재하고 있으며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강아지 똥도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없을 리 없다.
그런데 몇몇 시인은 이야기한다.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질문이 아예 풀 수 없는 질문이었다고. 세상에 태어날 이유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괜히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말이다. 최승자 시인이 바로 그 몇몇 시인에 해당한다.
최승자 시인은 질문도 답변도 거절한다. 질문이라는 희망과 답변이라는 행복이 사라지자 깊은 외로움만 남았다. 외로움은 일종의 괴로움이다. 그것은 누구하고도 공유할 수 없고, 도움을 요청할 방도도 없다. 외로움은 자발적이며 긍정적인 고독과는 다른 것이어서, 영혼을 쥐어짜는 형벌에 가깝다. 그 형벌에 시달리는 자의 초상이 이 시에 그려져 있다.
최승자 시인은 파격적인 작품으로 등장해 우리 시단의 매우 독특한 존재가 됐다. 그가 말하는 것들은 이전에 누구를 통해서도 말해진 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찬이 시인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외로움은 1인 감옥과 같다. 외로운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 한 뼘의 위로도 전해줄 수 없으니, 그 점을 통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