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대한민국에는 ‘기자 시인’ 혹은 ‘시인 기자’의 훌륭한 계보가 있다. 기형도가 바로 기자 시인의 계보를 잇고 있다.
시인 기형도는 살아생전 첫 시집을 준비 중이었는데,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갑자기 요절했다. 그래서 유고 시집이 유일한 시집이 되어 버렸다.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편수가 많지 않아도 인상적인 언어와 이미지, 독특한 작품이 돋보이는 시집이었다. 특히나 ‘엄마 생각’은 일찍 세상을 떠난 한 청년의 생애를 생각할 때 더욱 가슴 아프게 읽히는 작품이다. 어린 형도는 혼자서 빈집을 지키는 아이다. 엄마는 열무를 무려 삼십 단이나 머리에 이고 시장에 갔다. 그걸 다 팔 때까지 엄마는 아들 곁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 엄마가 팔아야 할 열무는 서서히 시들어 갈 거고 어린 형도도 빈집에 담겨 조금씩 시들어 간다. 무섭고 외롭지만 아무도 없다. 이때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지 청년이 된 기형도의 마음속에서도 그날의 어린 형도는 늘 훌쩍이며 울고 있다.
시인 기형도가 더 살았더라면 그의 좋은 시를 더 많이 보았을 텐데 아쉽다. 더불어 저 어린 형도가 아직도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청년 기형도가 더 살아 장년 기형도가 되고 노년 기형도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어린 형도가 어디서라도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