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되찾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박성룡 시인은 ‘풀잎’을 노래하기로 유명한 시인이다. 초롱초롱 맑은 풀잎의 시 외에도, 이 시인에게는 좋은 시가 많다. 특히나 이 시인은 자연에 기대서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에 재주와 특기가 있었다. 그중에서 ‘교외’라는 작품과 ‘바람 부는 날’, 대중에게는 이 두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바람 부는 날’은 요즘에 딱 맞는 시다. 겨울이 턱밑까지 왔는지, 근래의 찬 바람은 어찌나 거센지 모른다. 나무에 겨우 붙어 있는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릴 기세로 불어댄다. 낙엽을 죄다 쓸어가서 가을의 흔적마저 없앨 생각인가. 오늘의 바람은 겨울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런 가을바람 밑에, 시인은 서 있다. 그때의 시인은 많은 무엇인가를 잃고 망연한 상태였다. 나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계속 잃어가고 있구나, 시인은 이렇게 독백하고 있다. 그리고 바람은 이런 상실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다.
사실, 바람이 시인을 쓸쓸하게 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쓸쓸함이 바람을 불러왔다는 것이 맞다. 기쁘고 즐거웠으면 바람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신나고 행복했으면 바람에 눈길이 머물 리가 없다. 마음이 비어 있고 금이 가 있으니까 바람이 그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쓸쓸한 것은 바람 탓이 아니라 마음 탓이다. 아니, 마음을 텅 비게 만든 사람과 세상 탓이다.
시인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그렇지만 저 쓸쓸한 바람이라도 내 쓸쓸함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이 시인은 조그맣게 위로받고 있다. 바람마저 없다면, 마음은 정말 혼자가 되어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