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 세 줄이 시의 전체이다. 읽고 나서 이해 못할 사람이 없다. 짧고 쉽지만 묘하다. 아니, 짧고 쉬워서 묘하다. 우리의 눈은 단 세 줄을 금세 읽어 버리지만, 마음은 시를 오래 곱씹는다. 이해가 쉽다고 해서 쉽게 쓰인 시는 아니라는 말이다.
먼 옛날부터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사람의 본성에 대해 논해 왔다. 그만큼 사람의 본성이란 몹시 중요한 문제이고, 또한 쉽게 알 수 없는 미스터리라는 뜻이 된다. 착한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반대로 악한 것이 사람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긴 역사와 논쟁을 봐도 도대체 한쪽 편을 들기란 쉽지가 않다. 성선설의 근거를 듣다 보면 그렇구나 싶다가도 성악설의 주장을 읽다 보면 그편에 설득되기도 한다.
과연 우리네 사람이란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함민복 시인은 성선설 측이다. 시에서는 그 근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손가락 열 개로 말이다. 배 속의 아가들이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달 은혜 입는 것을 꼽아보려고, 손가락 열 개를 가지게 되었다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증거가 어디 있나 싶다. 손가락이 열 개가 된 유래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 유래를 믿는 사람은 선할 수 있다.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이 손가락은 어머니 은혜, 이 손가락은 어머니 사랑, 이 손가락은 생명의 소중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이 나쁘게 살 수가 없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성악, 성선은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할 절대적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나 선택의 문제가 된다. 무릇 선한 눈에는 선한 사람이, 선한 마음에는 선한 세계가 깃든다.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우리는 손가락 열 개의 사랑스러운 유래를 마음에 심을 것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