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儀式)·3 ― 전봉건(1928∼1988)
나는 너의 말이고 싶다.
쌀이라고 하는 말.
연탄이라고 하는 말.
그리고 별이라고 하는 말.
물이 흐른다고
봄은 겨울 다음에
오는 것이고
아이들은 노래와 같다라고 하는
너의 말.
또 그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불꽃의 바다가 되는
시이트의 아침과 밤 사이에
나만이 듣는 너의 말.
그리고 또 내게 살며시 깜빡이며
오래
잊었던 사람의 이름을 대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평화라고 하는 그 말.
첫 행이 쾅! 하고 와 닿는 시다. ‘나는 너의 말이고 싶다’니, 이런 고백을 들으면 다 죽어가던 연애 세포마저 살아날 것 같다. 그런데 읽다 보면 본격 연애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연애시가 아니라고 해서 실망하지 말자. 이 시는 사랑 노래는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읽는 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이것은 희망의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처음에 ‘너의 말’이 되고 싶다고 했다. 사실 그 다음부터가 본론이다. 시인이 되고 싶은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니다. 맨 처음, 그는 쌀이라는 말이 되고 싶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쌀은 가장 절실한 말이다. 다음으로, 그는 연탄이 되고 싶다. 차가운 구들장에 몸을 누인 사람들에게 연탄은 가장 고마운 말이다. 또 그는 별이 되고 싶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별은 마지막 비상구가 되어 준다.
쌀 연탄 별만 희망일까. 겨울이 지나 다가오는 봄, 아이들의 순수함, 그리고 평화까지 이 시는 가만가만 불러낸다. 이렇게 세상에 꼭 필요하고 좋은 단어들을 모아서 시인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고맙고 기쁘다. 함몰된 희망의 부위에 새살이 돋는 느낌, 이 시는 그런 생동감을 전해 준다.
전봉건 시인은 여러모로 좋은 시인이었다. 시를 잘 썼고, 어려운 문예지 일을 도맡아 했고, 젊고 가난한 후배 시인들의 사정을 잘 챙겨 주었다. 나무처럼 그늘이 넓어서 그 그늘에 사람들이 모여 고민을 토로하고 어려움을 덜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희망의 시는 더욱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그는 쌀과 연탄과 별과 평화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