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 나라에 바쳐 오랑캐 평정하리라 맘먹었거늘, 때를 못 만났으니 물러나 농사나 지어야 하리.
문장 좋아한다고 할 정도는 못 되어도 붓과 먹을 가까이했고, 스스로 병 많음을 탄식해도 마음만은 더없이 풍족했지.
한평생 내 심지는 별처럼 밝았건만, 아, 녹슨 청동거울에야 그것이 어찌 밝게 비치리오.
(鐵面蒼髥目有稜, 世間兒女見須驚. 心曾許國終平虜, 命未逢時合退耕. 不稱好文親翰墨, 自嗟多病足風情. 一生肝膽如星斗, 嗟爾頑銅豈見明.)―‘거울을 보며(남조·覽照)’ 소순흠(蘇舜欽·1008∼1048)
말쑥하든 추레하든 거울에 비치는 겉모습은 거짓이 없다. 몸을 바쳐 외적을 평정하리라는 결심, 일평생 견지해온 공명정대한 마음이라고 해서 거울이 특별 대우를 해줄 리 없다. 험상궂은 인상에 놀란 겁쟁이들이 자신의 웅지를 헤아려주지 못하니 이대로 초야에 묻힐 운명임이 분명하다. 그 불만과 분노를 시인은 가만히 거울 앞에 서서 삭이고 있다. 문장을 즐겨 짓는다고 자부할 만큼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어서 필묵을 가까이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본다. 한데 마음의 병이 깊어진 마당에 풍부한 감정을 주체하긴 쉽지 않았을 터, 평정심을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시인은 결연한 외침을 쏟아낸다. 별처럼 밝은 내 심지를 녹슨 거울이 무슨 수로 밝게 비춰 준단 말인가. 기능을 잃은 거울을 기준으로 삼는 한 시비곡직은 흐트러지고 세상은 온통 혼돈에 빠질 게 뻔하지 않은가.
‘문장 좋아한다고 할 정도는 못 된다’는 겸양과 달리 소순흠은 북송 시문 혁신을 주도한 인물. 문호 구양수(歐陽脩)가 ‘나이는 나보다 어려도 문장 학습에서는 내가 오히려 뒤진다’라고 칭송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