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이름 숨기고 살 필요 없겠군. 지금 세상 절반이 그대들과 같겠거늘.
(暮雨瀟瀟江上村, 綠林豪客夜知聞. 他時不用逃名姓, 世上如今半是君.)
―‘정란사에서 묵다 밤손님을 만나다(정란사숙우야객·井欄砂宿遇夜客)’ 이섭(李涉·800년대 초엽 활동)
강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된 시인의 배 안으로 도적 떼가 들이닥쳤다. 시인의 신분을 확인한 도적 수괴의 반응이 놀라웠다. ‘태학박사를 지낸 이섭(李涉)이 분명하다면 내 익히 그 시명(詩名)을 듣고 있으니 재물 대신 시 한 수면 족하다’는 거였다. 이 황당한 요구에 시인이 즉흥적으로 응해준 게 바로 이 시다. 도적조차 자기를 알아볼 정도라니 굳이 이름을 숨기고 은둔 생활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진다. 하물며 지금 세상의 절반이 도적 떼와 한통속이겠거니, 홀로 고고한 척 초연한 삶을 모색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개탄이기도 하다.
대놓고 재물을 약탈하는 눈앞의 도적에 대해서야 비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시인의 대응은 우아하다. 도적 대신 녹림호객(綠林豪客)이라는 칭호로 나름 예우해 주는 모양새를 갖췄다. 경우에 따라 이 말은 도적 외에 의적(義賊)으로도 썼으니까. 게다가 ‘세상의 절반이 그대들과 같다’면서 은근히 도적 떼가 횡행하는 세태와의 연대감마저 들먹인다. 삶의 행적도 잘 알려지지 않고 남긴 작품도 10여 수에 불과한 시인의 명성을 도적 수괴가 흠모했다는 게 의심스럽지만, 시를 받아든 그들이 시인에게 술과 고기까지 대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도적과 시, 이 어색한 부조화가 보여주는 해학미에 더하여 시는 무덤덤한 표정 속에 풍자라는 또 하나의 별미를 감추고 있다. 풍자의 칼날이 겨냥하고 있는 건 ‘시 맛을 아는 도적’이 아니라, 청렴한 척하지만 ‘도적이나 다름없는 세상의 절반’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