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으레 술빚이 깔리는 건, 인생 일흔 살기가 예부터 드물어서지.
꽃밭 속 오가는 호랑나비 다문다문 보이고, 물 위 스치며 잠자리들 느릿느릿 난다.
봄날의 풍광이여, 나와 함께 흐르자꾸나. 잠시나마 서로 즐기며 외면하지 말고.
(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 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 穿花(겹,협)蝶深深見, 點水청(전,정)款款飛. 傳語風光共流轉, 暫時相賞莫相違.)―‘곡강(曲江)’ 두보(杜甫·712∼770)
조회가 끝나는 대로 강가로 나가 술에 젖는다. 무일푼이 되면 입은 옷을 저당 잡히고라도 마신다. 급기야 외상술로 이어지니 도처에 술빚이 깔리는 건 예사. 왜 이토록 음주에 목매는가. 시인은 ‘인생 일흔 살기가 예부터 드물었다’는 핑계로 술빚의 당위성을 강변한다. 길지 않은 인생, 삶의 신고(辛苦)에 시달리는 마당에 술빚 걱정까지 하며 살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한탄한다. 두보의 험난한 인생 경로를 되짚어 보면 자포자기 같은 이 고백이 영 생뚱스럽지만은 않다. 취한 시인의 시야에 잡힌 건 나비와 잠자리. 저들의 아름다운 자유가 바야흐로 봄 풍광에 녹아들고 있다. 잠깐 동안의 즐거움, 잠깐 동안의 탐닉일망정 서로 외면하지 말자는 시인의 소망은 그래서 더 간곡하다.
시인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예순 무렵에 세상을 떴고, 당대 묘지명에 새겨진 5000여 명의 평균 나이가 59.3세라는 기록도 있으니 ‘고희(古稀)’란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이 말이 괜히 성어로 통용되었겠는가. 그렇더라도 당시 조정의 특별 예우를 받으려면 여든은 넘겨야 했다. 여든부터는 곡식과 비단이 내려졌고, 열 살 단위로 종6품에서 종3품에 이르는 명예 관직까지 부여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