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이 나면 늘 혼자 그곳에 갔고 즐거운 일은 그저 혼자만 알았지.
물줄기가 끊어진 곳까지 걸어가서는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았고
우연히 숲속 노인을 만나면 담소 나누느라 돌아올 줄 몰랐지.
(中歲頗好道, 晩家南山수.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値林수, 談笑無還期.)
―‘종남산 별장(종남별업·終南別業)’ 왕유(王維·701∼761)
‘시불(詩佛)’이란 별칭을 얻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던 시인은 만년에 종남산 기슭에 마련한 별장에서 은자(隱者)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어울릴 친구 하나 없을지라도 물줄기의 끝자락 수원지(水源池)까지의 산책,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구름 바라기는 시인에게 무한의 쾌감을 안겼다. 정4품 상서우승(尙書右丞)이라는 고위직에 있었던 시인이 탐했던 ‘즐거운 일’이 이 정도라면 설사 그가 그걸 ‘혼자만 알았다’ 한들 그 무욕의 에고이즘을 탓할 순 없겠다. 숲속 노인과 담소라도 나눌라치면 귀가할 생각조차 않았다니, 장안 인근의 이 별장에서 반은 관리로 반은 은자로 지내길 염원했던 시인의 소탈함이 오롯이 묻어난다.
한시 속 종남산(혹은 남산)에 담긴 두 가지 대조적인 이미지. 도연명이 ‘동쪽 울밑에서 국화꽃 따는데, 남산이 그윽하니 눈앞에 펼쳐지네’라 했던 그 남산은 유유자적한 은둔 생활의 대명사다. 반면 종남산은 또 출세에 대한 강한 집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역대 황제 가운데 종남산의 은자를 인재로 발탁한 사례가 더러 있는데, 당대 노장용(盧藏用)은 바로 이 ‘종남산 은거’ 전략을 통해 무측천의 부름을 받았다. 여기서 유래한 성어가 종남첩경(終南捷徑),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란 의미다. 지조가 높은 척 종남산에 위장 은거하면서 벼슬을 얻으려는 위선자를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