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모여서 이야길 한다
물이 모여서 장을 본다
물이 모여서 길을 묻는다
물이 모여서 떠날 차빌 한다
당일로 떠나는 물이 있다
며칠을 묵는 물이 있다
달폴 두고 빙빙 도는 물이 있다
한여름 길을 찾는 물이 있다
달이 지나고
별이 솟고
풀벌레 찌, 찌,
밤을 새우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호수는 잔잔하다. 아니, 잔잔하다고 여겨진다. 언젠가, 호수의 표면은 거울과 같다고 쓴 시인이 있었다. 땅의 커다란 눈동자가 호수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가득한데도 참 고요하여라. 많은 사람의 가슴에 호수는 이런 이미지로 살아 있다.
그런데 조병화 시인의 호수는 조금 다르다. 호수를 거울이나 눈동자와 같이 어떤 한 개의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호수는 일종의 집합이다. 그것도 아주 여러 의미가 모여 있는 집합이다. 호수를 조금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야기하는 물과, 장 보는 물과, 길을 묻는 물과, 떠날 차비를 하는 물이 들어 있다. 각자의 사연과 인생을 지닌 물들이 모여 있으니 이런 호수가 잔잔할 리 없다.
사실 시인은 호수가 아니라 사람들의 집합, 다시 말해 우리 사회를 말하고 있다. 이 사회에는 참으로 여러 사람이 있다. 떠나려는 사람들만 해도 그중에는 금방 떠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름 같은 마음을 품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인 듯 보이는 호수에도 서로 다른 이들이 공존한다는 말, 전체의 세세한 사정을 들여다보는 저 시인의 눈은 참 옳다.
더불어 생각한다. 저 호수에도 그토록 다양한 물이 있다는데, 그중에는 나를 닮은 무엇도 있는 것만 같으니 천지간에 나 혼자는 아니구나. 세상에 빙빙 도는 물은, 물결에 처지는 물은, 혼자 떨궈진 물은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