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예전에는 ‘건강한 마음에 건강한 몸’이 자란다고 했는데, 요즘에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라고들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요즘, 건강한 마음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위에 시달리다 보면 생각마저 시든다. 지칠 때에는 지쳐야 한다. 가뜩이나 힘이 부족한데 새로운 일을 도모하거나, 거창한 계획을 완성하려 하면 탈이 나기 쉽다. 크고, 세고, 가시적인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강은교의 시, ‘겨자씨의 노래’처럼 말이다.
옛날부터 겨자씨는 작아서 유명했다. 그래서 지극히도 작은 것들의 대명사로 불린 지 꽤 되었다. 그런데 겨자씨의 입장에서 겨자씨는 작지 않고 충분하다. 그 안에 겨자씨의 온 세계가 담겨 있으니까 이미 충족되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겨자씨를 비웃는다. 너는 작으니까 보잘것없다고 얕잡아 본다. 겨자씨의 눈으로 본다면, 인간들이야말로 참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시인은, 겨자씨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다. 사람아, 더 커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거울 필요도 없어. 작은 것은 작은 것이 아니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이렇게 말하는, 작디작은 겨자씨는 작은가. 아니, 자기에게 내려진 편견을 스스로 걷은 그것은 의연하며 크다.
비교하는 사람의 기준이 달라지면 작았던 것이 커지기도 하고, 컸던 것이 작아지기도 한다. 시를 읽기 전에는 겨자씨가 아주 작아 보였는데, 시를 다 읽고 나니 겨자씨가 커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다. “뭣이 중헌디!” 겨자씨도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산다. 사람들이 죄다 너무 뜨겁고, 너무 크고 싶어 했기에 올 더위는 더 더운가 싶다. 그러니 지친다면 가만히 앉아, 작은 겨자씨를 생각하자. 작지 않은 겨자씨를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