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녹산의 반군이 수도 장안 부근까지 쳐들어오자 당 현종은 사천으로 피신했고, 그 와중에 태자(숙종)가 황위를 계승했다. 소식을 접한 두보는 가족을 친척집에 맡겨둔 채 황제를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숙종의 행재소(行在所)로 향했고, 도중에 반군의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압송됐다. 당시 그는 미관말직인 데다 명성도 높지 않았던 터라 곧 풀려났다. 시는 장안이 함락된 이듬해 봄, 사그라지지 않는 전화(戰火) 앞에 그저 무력하기만 한 시인의 탄식을 담았다. 무성한 초목, 꽃과 새는 으레 희망이나 아름다움으로 각인되지만 난세의 혼돈을 온몸으로 경험한 시인에게는 암울 그 자체다. 하여 시제 춘망은 봄 풍경의 조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대의 봄’에 대한 갈망이다. 시의 제3, 4구를 “시절을 생각해서 꽃조차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조차 마음을 못 가눈다”고 의인화해 해석하기도 한다.
다양한 소재를 다룬 두시(杜詩)는 1400여 수가 전해지는데, 그중에서도 시대 사회상이 반영된 작품이 단연 빼어나다. 두시를 시사(詩史)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백이 명리에 초연하고 자유분방해 시적 기교나 규율을 엄격히 따지지 않은 데 비해, 두보는 투철한 유가 사상에다 성격마저 치밀해서 시작에 남다른 공력을 들였다. 이 때문에 두시는 뭇 시인들의 창작 교범이 되기도 했다. 이런 대조적인 시풍 때문에 이백과 두보는 각각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