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모란을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여겨 화려하고 풍성한 모란 송이를 곧잘 화폭에 담았다. 한자로는 모단(牡丹)으로 표기한다. 우리에게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김영랑 시인의 시구가 정작 꽃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당나라 때는 모란을 완상(즐겨 구경함)하는 풍조가 널리 유행해서 장안 꽃시장은 당 말엽까지도 큰 호황을 누렸다. 황실에서는 장안 근교의 여산(驪山)에 모란만 재배하는 화원을 두기까지 했다. 화훼농은 일반 농가에 비해 소득이 월등하게 높아 대대손손 가업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조정의 부역을 면제받는 경우도 있었다. 현종 시기에 모란 값이 특히 비싸 한 그루에 수만 냥에 달하기도 했다. 당시 쌀 한 말이 20∼30냥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런 풍조를 풍자한 백거이의 시 ‘꽃 구입’을 보면 “불타듯 붉은 모란 백 송이, 겨우 흰 비단 다섯 묶음 값”이라 했다. 겨우라는 말은 물론 비아냥이다. 같은 시에는 또 “한 더미 짙은 색 모란, 평민 열 가구의 세금에 해당한다”는 표현도 있다.
모란은 꽃 색깔이 짙을수록 더 귀중하게 여겨서 “흰 꽃은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지만 이름만은 그래도 모란이라네”라는 백거이의 또 다른 시구도 있다. 요황위자(姚黃魏紫), ‘요씨 가문의 황색 모란과 위씨 가문의 자주색 모란’이라는 말이다. 원래는 송나라 낙양의 두 가문에서 재배한 진귀한 모란을 가리켰는데 후일 ‘비싸고 진귀한 꽃’을 지칭하는 성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