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를 허물고 거대한 연못을 조성한 것도 못마땅한데 그 주변에 심은 나무를 보니 더욱 고약스럽다. 경관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왜 하필 유실수도 아닌 관상용 장미인가. 기록을 보면 이 시는 가도가 과거에 낙방한 직후, 당시의 재상 배도(裴度)가 흥화사에 개인 정원을 수축한 것을 고깝게 여긴 나머지 그 담벼락에다 화풀이로 써놓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재상을 향한 한 서생의 신경증적 비아냥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다.
이 시기는 안사의 난을 겪은 여파로 “부자는 넓디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빈자는 발 디딜 땅 한 조각 없다”는 원성이 자자하던 때였다. 시는 이렇게 배도를 비꼬고 있지만 기실 배도는 성품이 강직하고 치적도 뛰어나 20년 재상을 지낸 중당(中唐) 중흥의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백성의 삶을 도외시한 채 사치에 빠진 상류층의 한 단면을 고발하려는 시인의 메시지가 불손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개인적 넋두리라기보다는 사회 집단의 울력 같은 것이어서가 아닐까.
가도는 퇴고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주인공. “중은 달빛 아래서 대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는 시구에서 ‘두드린다(敲·고)’가 좋을지 ‘민다(推·퇴)’가 좋을지를 고심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처럼 한 글자, 한 구절에 각별히 고심했기에 후일 맹교(孟郊)와 함께 ‘고음(苦吟) 시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노(詩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시작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골몰했다는 말이겠다. 그는 삶의 절망과 허무를 주로 노래했기에 정작 이 시처럼 현실 풍자를 다룬 작품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