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산세. 정작 산속에서는 그 진면목을 파악하기 어렵다. 숲을 벗어나지 않고서 어찌 숲을 제대로 보겠는가. 사물에 몰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물의 실체를 알아낸다는 법은 없다. 당사자가 모르는 세상의 진실이 때로 방관자의 눈에는 쉽게 들어온다. 협소하고 편협한 시각을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식은 어쩔 수 없이 단편적이고 일방적이고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각을 달리함에 따라 세상사 이치가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설파하려는 발상. 이렇게 곧잘 사변적, 이론적 경향으로 흘렀던 게 송시(宋詩)의 한 특징이고, 당시와의 차별성이기도 하다. 사물의 실체나 사건의 경위를 비유하는 성어 ‘여산진면목’은 이 시에서 유래했다.
여산의 폭포수를 보면서 이백은 “날 듯 떨어지는 삼천 자(尺) 물줄기,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가”라는 명구를 남겼다. 정철(鄭澈)이 ‘관동별곡’에서 이를 맞받아 금강산 12폭포를 묘사하며 “이백이 지금 와서 다시 의논한다면 여산 폭포가 여기보다 낫다는 말은 못 하리니”라고 자부했다. 이어 “정양사(正陽寺) 진헐대(眞歇臺)에 다시 올라앉으니 여산(실제는 금강산) 진면목이 여기서야 다 보인다”고도 했다.
그 유명한 여산은 중국 남부 장시(江西)성에 있다. 송나라 소식이 첨예한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서 필화(筆禍) 사건을 겪은 후 좌천되어 이 지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열흘간의 여산 유람을 끝내고 산 서북쪽에 위치한 서림사 벽에 이 시를 남겼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적벽부(赤壁賦)의 작자인 소식, 동파(東坡)가 그의 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