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다섯 말 녹봉(祿俸) 때문에 굽신거리지 않겠다고 진작 관직을 내던졌던 도연명이다. 자신은 소신껏 세속의 명리를 팽개쳤으면서 자식의 앞날에 대해선 대범할 수 없었던 것일까. 맏이부터 막내까지 다섯 자식을 하나하나 호명한 작심부터가 별스럽다. 시제가 ‘자식 책망’인 데다 저들의 됨됨이 어느 하나도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는 질타가 분명해 보인다. 한데 시인이 평생 견지한 생활철학에 비춰 보면 정색을 하고 내지른 책망이 오히려 생경스럽다. 천명으로 알고 술이나 들이켜자는 마지막 구절이 그 방증이다. 뿐이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시인은 “부귀는 내 원하는 바 아니며 신선 세계도 기대하지 않는다. 자연의 변화에 인생을 맡겼다 돌아갈 뿐, 천명을 즐기는 것 외에 무얼 또 의심하랴”고 하지 않았던가. 자식 걱정이야 십분 이해한다 해도 푸념처럼 대놓고 실망을 토로한 이가 도연명이라면 그 진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진다.
그래서인가. 이 시에 대한 해석도 엇갈렸다. 두보는 성실하지 못한 자식을 도연명이 호되게 훈계한 것이라 보았지만, 송대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시인의 한탄 너머에 아버지로서의 자상함과 해학이 은근히 스며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