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울음을 걸어서
내 어린 날로 간다.
발가숭이에 까까머리
맨발에 아장걸음
아직 하나도 늙지 않은
내 어린 날의 그 울음 속
뻐꾸기를 따라서.
갈앉은 녹음유황
마알갛게 뜬 아카시아분향
하얀 길 위에 깔린
그날의 내 앙앙울음
울음 끝 추스림같은 아카시아향의
긴긴 꼬리를 밟아서.
(후략)
―박경용(1940∼)
다들 봄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올해 봄은 서둘러 왔다. 개나리, 목련, 벚꽃은 제 차례를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의 3월은 4월의 풍경을 미리 끌어다 써버렸다. 사과꽃은 평년보다 열흘 일찍 피었고 한 달은 기다려야 했을 아카시아 향기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쁜 인간의 삶을 닮아가는지 우리의 봄마저 바빠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름과 더위와 녹음도 더 일찍 찾아올 것이다. 옛 노래에 뻐꾸기가 울어야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는데, 우리의 여름은 뻐꾸기 울음소리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게 세상이라지만 이토록 큰 변화는 당황스럽다.
오늘의 시는 이런 당혹과 거리가 멀다. 여기에는 전형적인 여름의 시작이 담겨 있다. 뻐꾸기가 울고, 녹음이 우거지고, 아카시아 향기가 퍼지는 그때. 원래 계절이란 매년 비슷한 모습과 분위기로 비슷한 때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기억과 몸, 그리고 영혼을 다해 특별한 그 시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이 찾아오면, 여름 속에 울던 어린 시절이 함께 찾아온다. 여름이 돌아오면, 잃어버렸던 과거의 조각도 같이 돌아온다. 우리는 그 찾아옴과 돌아옴을 천천히 만끽하고 싶다. 이 시에서 가능했던 그 일을 우리의 계절에서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