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엄마의 입안은 폭설을 삼킨 밤하늘, / 사람이 그 작은 단지에 담길 수 있다니 / 엄마는 길게 한번 울었고, /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김치를 꺼내지 못했다. / 눈물을 소금으로 만들 수 있다면 / 가장 슬플 때의 맛을 알 수 있을 텐데 / 둥둥 뜬 반달 모양의 뭇국만 / 으깨 먹었다. / 오늘은 간을 조절할 수 없는 일요일.―정현우(1986∼ )
김치는 일종의 솔 푸드다. 이 집 김치와 저 집 김치는 맛이 다르고, 이 고장 김치와 저 고장 김치는 재료도 다르다. 김치라는 말은 하나지만, 각자의 영혼에 박혀 있는 김치의 맛과 형태, 색과 냄새는 제각기 다르다. 나에게는 나만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김치가 있다. 과장을 보태자면 우리의 김치는 우리나라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중심에도 김치가 있다. 그 김치는 할머니가 담가 준 것이다. 아마도 매년 먹어본 것이어서 열어 보기도 전에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맛일 것이다. 미각이 둔해지는 탓에 매년 조금씩 짜게 담가 보내면서도 할머니는 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맛일 수도 있다. 맛의 기억, 특히 유년 시절에 경험했던 맛이나 어려운 시기에 단비처럼 찾아온 맛은 사람 내부에 오래오래 남게 된다. 맛은 때로 우리의 영혼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할머니를 잃는다는 것,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솔 푸드와의 완전한 결별이다. 이것은 내 영혼의 일부와 작별하는 일, 영혼의 각인과 결별하는 일이다. 김치는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삼대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면서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는 증거가 된다. 얼마나 슬픈지 다 표현할 수도 없어서 시인은 할머니 김치를 먹을 수 없다고 썼다. 눈물 맛인지 김치 맛인지 알 수 없게 될 테니 김칫독을 열기도 두려울 것이다.
이렇게 김치란 사람의 인생이 담긴 음식 이상의 음식이다. 때로 거기엔 삼대의 삶과 기억과 영혼까지 담겨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김치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김치를 ‘우리 김치’라고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