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사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박현수(1966∼ )
알게 모르게 우리는 생명을 사랑한다. 반대로 생명 외의 ‘사물’에 대해서는 좀 차갑게 보는 경향이 있다. ‘사물화’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도구로 전락하면 우리는 ‘사물화’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시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시는 녹슨 깡통, 타고 남은 연탄재, 사금파리 하나도 허투루 보지 말라는 쪽이다. 영혼도 없고 피도 흐르지 않는 사물도 우리의 시심을 자극할 수 있다.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성리학에서도 사물을 매개체로 삼아 심성을 바르게 수양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시도 이것과 조금 비슷한데, 시인은 사물을 매개체로 삼아 자신의 심상을 들여다본다. 쉽게 말해 사물은 일종의 통로고 안내자다. 우리는 그것의 손을 잡고 사유한다, 느낀다, 본다. 평소 듣지 못하던 사물의 말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의 말’을 깨닫게 된다.
잘 모르겠다면 이 시를 읽어 보시라. 시인은 벽시계와, 벽과, 떼어진 자국을 바라보고 있다. 입도 없고 말도 없는 사물이지만, 시인은 그것들과 대화할 수 있다. 가만히, 천천히 기다리면 벽시계가 속삭인다. 빈 벽에서는 의미가 슬금슬금 올라온다. 떼어진 자국, 없어진 사물조차 뭔가를 알려준다. 놀랍지 않은가. 유튜브와 포털의 일방적 정보 전달에 지쳐 간다면, 말을 걸어 보시길 추천한다. 눈앞의 사물에, 이미 사라진 사물에, 또는 내 속에 숨겨진 마음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