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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标准韩国语」 高级1册-제10과
日期:2022-03-18 11:25  点击: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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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과 한국의 여성
 
1항 유관순
 
   유관순은 1904년 3월 15일,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지령리에서 태어났다. 대를 이어 이 마을에서 살아 온 유관순의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는 선비였다. 그는 청소년들을 잘 가르쳐야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관순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서울에 있는 이화 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때가 1916년이었다.
 
   이 무렵 우리 겨레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겨레가 마음을 합하여 일제히 독립을 외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날, 유관순도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소가 한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유관순과 친구들도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튿날 일본은 이화학당의 문을 강제로 닫게 했다. 그래서 기숙사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유관순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만세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부를 준비를 하였다. 유관순은 교회와 스승들의 도움을 받아 동지들을 모으고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나이 어린 소녀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일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한 날이 왔다. 그 날은 그 고장의 장날이었다.아침부터  장터에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보통 때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정오가 되자 유관순의 선창에 이어 터진 만세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깜짝 놀라 달려온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만세를 부르며 전진하는 대열을 막으려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으나 만세소리는 계속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고 유관순은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나서 유관순은 공주와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마침내 7년의 징역형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감옥에 갇혔다. 그렇지만 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는 유관순의 신념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당하여 몸이 몹시 쇠약해졌지만, 옥중에서도 끝까지 항거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열 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우리 겨레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2항 신사임당
 
   한국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훌륭한 여성을 한 분 뽑으라고 하면 서슴지 않고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꼽을 수 있다. 역사상 어진 어머니는 많이 있어도 사임당처럼 시, 그림, 학문에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한 훌륭한 어머니는 흔치 않았다. 신사임당의 경우에는 이같이 여러 가지 뛰어난 재주를 갖추고 효녀로서도 이름나 있었기에 우리는 그 분을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임당은 1504년 강원도 강릉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인물과 재주가 뛰어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천부의 재주가 비상하여 여자로서 배워야 할 바느질이나 자수는 물론이고 글, 글씨, 그림 그리고 학문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눈부신 천재를 발휘하여 7세 때 이미 세종대왕 때의 유명한 화가 안견의 그림 솜씨를 본받아 산수화를 익혔으며 그것이 발전하여 「포도」나 「풀벌레」같은 절묘한 작품을 그렸다. 그 외에 유교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널리 탐독하여 뛰어난 학식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열아홉 살 때 서울에 사는 이원수 씨와 결혼하여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극진한 효녀였던 사임당은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글로 나타내어 주옥같은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사임당은 또한 남편에게는 어진 아내였다. 남편은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사임당은 공부하는 남편 곁에서 밤을 새워 바느질을  하면서 남편을 격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옳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남편은 사임당의 충고를 따랐기 때문에 후에 큰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사임당은 33세 때 아들 율곡을 잉태하여 낳았다. 사임당은 모두 7남매(4남3녀)를 두었는데 후에 유명한 학자가 된 율곡은 셋째 아들이었다. 사임당은 자식에게는 지혜로운 어머니였다.어린 자녀들에게 늘 정직하고 바른 마음과 행동을 지니도록 가르쳤다.
 
   사임당은 4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후대의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될만큼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지극한 효녀, 어진 아내, 훌륭한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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