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인물( !! )
1. 신사임당^504〜1550
가을 바다는 벌거숭이들의 북적램이 없어서 좋다. 동해 바다의 맑
은 물을 그토록 실컷 보았건만 그래도 아쉬워서 자꾸 뒤를 돌아다 보
며 강릉에 들어선다. 잘 닦인 시골길을 얼마쯤 가면 오른쪽에 오죽헌
의 팻말이 보이고, 이내 넓은 대로로 차는 굴러 들어간다. 다른 고적
지와 마찬가지로 길을 닦고 사당을 짓고 하여, 버젓한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신사임당의본가이다.
역사상 훌륭한 여성이 누구냐고 한다면 신사임당을 꼽는 이가 많을
것 같다.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이 유명해서가 아니라 신사임당 자신만
으로도 훌륭한 여성으로 손꼽을 만하다. 그는 바느질은 물론 학문과
서예, 그림 등 예술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천재성을 발휘한 분이다. 또
어머니에 대한 효성과 아들 교육에 바친 열의와 정성은 그를 재능과
덕을 겸비한 훌륭한 여성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사당이 있다. 사당에서 분향하고,그
옆에 신사임당이 거처했다는 방을 들여다 본다. 그 방에서 율곡을 낳
고 기르며 작품도 만들며 했겠지. 지나치게 깔끔한 분위기가 오히려
어색한데도 어딘가 낯설지 않은 사임당의 단아한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뒷뜰의 대나무가 바람에 부스럭부스럭 옛 이야기를 하고자 한
313314 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 !! )
다. 주변에 대나무 숲이 많고 감나무,포도나무와 여러가지 꽃들이 많
았다던데. 멀리 보이는 대관령,동해안의 맑은 물, 이런 것들이 모두
좋은 글과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데 Ȁ향을 주었다던데. 몇 바퀴를
돌아도 인적은 없고 가끔 떨어지는 낙엽 소리만 쓸쓸함을 더해 준다.
작품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전시실에는 작품이 많지 않
다. 벽에 붙은 그림들의 섬세함과 정교함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 같다. 가지,꽃,나비, 벌, 잠자리ᅵ... 어떻게 이런 소재로 그림을 그
렸을까? 은은하면서도 선명한 색이, 닭이 와서 쯔을 뻔했다는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 고움과 부드러움과 선명함을 비단결에 비할까?
전시장 모통이에서 복사한 그림들을 팔고 있다. 나도 몇 장 사다가
병풍이라도 해 놓고 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 귀하고 아름다운 그림
을 복사해서 본다는 것이 무례한 일일 것 같아서다.
신사임당
정 희 : 우리 역사상 여자로서 훌륭한 인물을 들라고 하면 신사임
당을 꼽을 사람이 많을 거야. 재주도 있고 덕도 있는데다가
아들도 잘 키워서 당대에 유명한 학자로 만들기도 했으니
어느모로 보나 존경할 만한 분이잖아.
Ȁ 선 : 그렇고 말고. 게다가 글 솜씨,그림 솜씨까지 뛰어났으니
신사임당 만한 분은 또 없지.
정 회 : 지금도 풀벌레와 포도, 가지가 담긴 사임당의 그림은 높이
평가되고 있어서 고급 옷장이나 화장대 같은 데에 무늬로
넣어 상품화되고 있어.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10 315
Ȁ 선 : 그 분 은 효성도 대단했나 봐. 홀로 계신 어머니 때문에 고
향을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니 말이야. 지금 남아 있는 시에
보면 어머니 곁을 떠날 때와 떠난 후에 그분의 마음이 어
떠했는가를 알 수 있지.
정 희 : 율곡도 효성심이 대단했다고 해. 그러니까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는 거지.
Ȁ 선 : 하여튼 신사임당은 우리 현대 여성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
한 인물이야.
정 희 : 그래서 요즘도 여성 단체에서 매년 그 해의 신사임당을 뽑
고 있잖아. 지식과 덕을 갖추고 글 재주와 그림 재주가 있
고, 남편과 아들,딸들이 모두 한결같이 잘 된 그런 사람을
하나 뽑아서 그 해의 신사임당이라고 칭하는 거야.
Ȁ 선 : 그런 상 받으면 가문의 Ȁ광이겠다. 먼 훗날 우리도 그런
상을 받게끔 노력해 보자꾸나.
다산 정약용〈1762〜1836〉
어느 시대에나 훌륭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훌륭한 인물
이 적당한 자리에서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활동하지 못했을
때 그 인 물 은 빛 을 못 보 고 그 시 대 는 발 전 을 못 하 는 것 이 다 .
다산 정약용도 그 시대에서 빛을 보지 못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다산은 머리가 좋고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었지만,시대를 앞선 진
보적인 생각을 책으로만 남겼을 뿐,그 시대에는 적용해 보지 못하고316 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
만 것이다. 그 시대는 당파 싸움, 천주학 탄압으로 혼란했던 때인데다
가 양반들은 부패했고, 지방 관리들은 백성들을 괴롭히던 시기ǿ다.
당파 싸움 때문에 또는 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는 귀양살이를 해
야 했고, 말년에는 고독하고 우울한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많은 책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쓰여진 그의 책들은 정다산
전서로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의 근본 사상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기본으로 하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다. 거기에 천주학의 Ȁ향을 받아 평등 사상도 가미된 것
이다. 중앙 관리로서의 경력, 지방 행정을 하는 동안의 경험,암행어
사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 보고 들은 것들은 그에게 생생한 교훈
을 주었고, 일생동안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에게 혁신적인 자료가 되어 그의 사상을 정리하게 했고,
많은 책을 쓰게 했다.
그는 국가 경Ȁ에 관한 모든 법과 규칙에 관하여 “경세유표【經世遺
表广라는 책을 써서 정치,경제에 대한 제도를 현실에 맞추어 개혁해
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재정 관리는 농민 경제와 지방 행정을
바로잡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했으며, 부패한 행정 때문에 농민
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행정상의 부정을 없
애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서류로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백성을 괴롭
히는 관리들을 많이 본 다산은 지방 관리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요령
을 적고, 아울러 관리의 단속도 강조했는데(목민심서 牧民心書ᅵ,첫째
는 관리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서 덕이 있는 관리가 되 어 줄 것 을 요
구했고, 둘째는 잘못이 있는 관리는 단속하되 법으로 엄격히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 밖에도 정다산 전서에는 지리,천문은 물론 의학,
과거제도 등에 대한 실학사상이 체계적으로 쓰여 있다.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 317
정다산이야말로 조선 학계의 진보적인 새 학문을 현실에 적용시켜
보려고 한 대표적인 실학자ǿ다. 다산이 세월을 잘 만나 그 뜻을 펐
더라면 조선의 발전은 월씬 빨랐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러한
사상을 펼 수 없었던 것은 그 시대적 바탕이 이를 수용할 만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다산의 사상
길 Ȁ : 지난 번에 가져간 책 다 읽었으면 가져 와. 책을 빌려가면
그냥 떼어들 먹으려 드니, 원 … .
경 민 : 아이, 형두,떼어 먹긴.... 곧 갖다 드릴게요. 아직 끝내지
못했지만 거의 다 읽었어요. 정다산은 참 대단한 학자더군
요.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행정을 백성을 기본
으로 해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은 유교에 바탕을 둔 실학
사상인가 본데,요즘 행정하는 사람들도 본받아야 할 점이
라고 생각했어요.
길 Ȁ : 암,양반 중심의 사회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놀랄 만
한 일이야. 더구나 국가 재정 관리의 중점을 농민 경제와 지
방 행정을 바로 잡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은 큰 개혁이야.
경 민 : 또 지방 관리들 스스로가 덕과 위엄이 있고 청렴결백해야 한
다고 하고,관리의 단속을 법에 따라 해야 한다고 했더군요.
길 영 : 그것이 그 당시의 부정부패를 직접 보고 만든 이론이 아닌
가? 워낙 사회의 혼란이 심하던 때ǿ으니까.
경 민 : 다산은 천주학의 Ȁ향도 많이 받은 모양이던데요.318 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
길 Ȁ : 그렇지. 다산의 평등사상은 천주학에서 나온 것이지. 천주
학 때문에 귀양살이도 했고,그의 저서는 대부분 귀양살이
를 하는 동안 쓴 것인데, 그런 진보적인 이론을 현실에 적
용시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경 민 : 그러게 말이에요.
청. 원효대사대17에86〉
때는 신라 문무왕 1 년, 중국 당나라로 향하는 원효,의상 두 스님
의 가슴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오랫
동안 벼르던 유학길에 올랐으니 두 스님의 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
러나 길은 험하고 멀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고난의
길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 날은 어두워지자 굵은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 속에서 비를 만난 두 사람은 비 피할 곳을 찾았다. 마침
웬 움막 같은 것이 보ǿ다. 비를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굴속으로 들어갔다. 굴 속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ǿ
지만 손으로 더듬어 보니 제법 넓었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
는 되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원효는 몹시 목이 말라 잠이 깼다. "물 한
모금만 마 셨 으 면 … . ”너무 목이 말라서 참을 수 없었던 원효는 무의
식 중에 손으로 주위를 더듬고 있었다. 뜻밖에도 물이 가득 담긴 바
가지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원효는 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꿀맛
같았다. 물이 이렇게 맛이 있을 수 있을까? 얼마나 시원하고 맛이 있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0 319
는지,원효는 그날 생전 처음으로 물을 마셔 보는 둣 했다. 원효는 부
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바가지를 옆에 둔 채, 다시 자리에 누웠
다.
다음 날 아침은 햇빛이 눈부시게 밝았다. 그런데 잠을 깬 원효와
의상 스님은 깜짝 놀랐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 곳은 집이 아니고 무
너져가는 커다란 무덤이었던 것이다. 원효 결에는 썩은 관이 있고,해
골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해골을 보자 원효 스님은 어젯밤에 물을
먹던 바가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보니 이게 웬일인가?
그것은 바가지가 아니고 해골이 아닌가? 그리고 어젯밤 그렇게도 맛
있게 먹은 물은 해골 속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원효는 그 때부터 구
역질이 나고 비위가 뒤집혔다.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먹을 때는 그렇
게 시원하고 맛이 있더니 갑자기 이럴 수가 있담! 아이구 죽겠다, 음
… . 그렇구나! 부처님 말씀에 모든 것은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
이 나는 것이지 마음이 죽으면 해골이나 다름이 없다【心生則種法生
心滅則彌骨宴不二)고 하시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마음가짐에서 비롯되
는 것이로구나. 모든 것이 다 마음의 조화로다(一切唯心造I 그렇다면
극락이 따로 없다. 이 세상이 극락일 수도 있다. 불법을 배우러 구태
여 먼 나라에까지 갈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원효는 의상과 헤어져서 모처럼의 유학 기회를 버리
고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귀국한 원효대사는, 마음이 맑아지면 모
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내용이 담긴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었다.
이 노래는 신라 곳곳에 퍼져서 고통 받는 신라 백성을 위로했다. 원
효는 이 때부터 분황사라는 절에 머물면서 자신이 깨달은 불법의 참
뜻을 책으로 쓰고, 불교 보급에 노력했다.320 제 60 과 역사 속의 인물
원효대사
장민구 : 요즘의 종교는 자꾸 기복신앙 쪽으로 발전하는 느낌이에요.
불교만 해도 그래요. 입시철이나 선거철이 되면 절에서 불
공드리고 기도하는 신자가 그렇게 많다면서요.
이혜선 : 그렇대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발등의 불을 끌 생각으
로 신앙을 가지려 드니 본래 종교의 뜻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벌어지지요. 불교의 전성기ǿ던 신라시대 좀 생각해 보세요. 그
런 작품들을 보느라면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잖아요?
장민구 : 어디 작품 뿐이에요. 원효대사 같은 스님이 나왔고, 그런
분들의 불법 연구도 대단했지요. 또한 불교의 일반 보급을
위해서도 여간 노력하지 않았지요.
이혜선 : 그래서 백성들이 웬만한 불경은 다 외웠다고 해요.
장민구 : 그때는 불교가 국교라서 모든 것이 불교에서 나오다시피 했
으니까 그 정도의 보급이 가능했겠지요.
이혜선 : 그렇기도 하지만 원효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계시지 않았던
들 신라의 불교가 그렇게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지기는 어
려웠을 거에요.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갔던 원효대사
는 우리가 찾는 극락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바로 이 세상
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또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어서
마음이 맑아지면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했다니,많
은 사람들이 신앙에 의지했겠지요.
장민구 :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랑 이야기가 많은데, 혜선 씨는 알고 있어요?
이혜선 : 그럼요. 요석공주하고는 결혼도 했잖아요. 그 아들이 저 유
명한 대학자 설총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