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빈 벅, 무너진 계단, 2001, 고무와 나무, 바닥 설치물
Kavin Buck, Collapsed Staircase, 2001, rubber on wood, floor installation, 48 by 120 by 72 inches (photo by Antony Photography courtesy the artist and South La Brea Gallery, Inglewood, California).
우리가 들추고자 하는 백인성이 겨우 개인적인 문제 또는 몰이해 / 나쁜 습관 이라면 별 고민 없이 감성적인 만남을 추구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단정해 버렸을 것이다. 허나 백인성은 개발자, 상사, 공해자, 경찰, 노동 조합 지도자, 단체 리더 또는 선생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지켜지는 인식적 틀 [category]로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틀로써 백인성은 African-American 젊은이들이 백인 젊은이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일곱 배나 높으면서 동시에 흑인 가족이 일 달러의 자산을 쥐고 있으면 백인 가족은 육 달러를 가지고 있는 구조를 지탱한다. 이러한 구조는 백인성 내부에서 나타나는 개인적 다름을 차단한다. 이 구조는, 인종적 차이의 이념을 강화하고, 백인성의 선호도를 높이며, 과학과 예술이 이러한 인종차별적 거짓들을 깔아 뭉개는 현실 속에서도 건재한다.
백인 우월주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이러한 전시회 아래 모인 총체적 재능 그 자체로는 가능치 않다. 할수 있는 것은 관객에게 백인성의 역학과 “별다른 것으로 표시치 않은 경우 백인”인 사회에서 사는 부작용을 이해 할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백인성을 노출시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캔버스, 예술관 또는 국가가 항상 백인 위주일 것이라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는 것.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월스트립 저널 기자의 질문을 넓히며 어떻게 하면 비백인 공간들을 찾아내고 촉진할수 있을 까 하는 질문을 품는 쪽으로 우릴 밀어줄수가 있어요. 구조적인 불공정함이 항상 그런 공간을 없애버린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