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길, 연산 옆에 뜬눈으로 누워있다.
새벽 햇살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연산의 눈을 비춘다.
연산 눈을 뜬다.
밖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드는 발자국 소리 들린다.
연산 몸을 일으켜 문을 연다.
나졸들이 처소 앞마당으로 모여들고 있다.
연산의 처소 지붕 용마루에서부터 앞 건물 지붕으로 긴 외줄이 나 있다.
그 위에 장생이 올라서 걸어가고 있다.
장생을 비추는 새벽 햇살이 영롱하다.
연산과 공길, 놀란다.
장생 줄 위에서 겅중겅중 걸으며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장생
(연산이 보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어허~
세상에서 젤 높은 놈이 사는 궁도,
예서 보니 아무것도 아닐세.
장생을 올려다보던 나졸들, 연산을 바라보며 처분을 기다린다.
연산, 아무 지시도 없이 장생을 두고 본다.
장생
내 살다 살다 별별 잡놈을 다 봤는데,
이 곳에 와서 잡놈 중에 잡놈을 하나 봤지.
내 그놈이 하는 짓을 낱낱이 아뢸테니,
샌님네들 한번 들어 보실라우?
연산, 장생의 공연을 즐기듯 빙긋이 웃는다.
장생 줄밑에선 나졸 등을 구경꾼 삼아 사설을 계속한다.
장생
먼저 그놈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쯤으로 아는데,
그래서 예서 죽어 나간 목숨이 저기 저
기왓장 수보다 많고!
연산
많고!
연산
기생질 하는 걸 볼랍시면,
이천 명이 넘는 기생들과 밤낮없이 방사를 치르는데,
이 놈 물건이 그 크기가
(팔뚝을 내밀며)
이만, 아니...
(팔뚝을 앞으로 쭉 더 내밀어)
이만해서 궁 안이 기생들의 자지러지는 소리로 가득허고!
연산
올커니, 가득허고!
하며 장생의 사설에 흥을 낸다.
공길의 얼굴, 하예진다.
의금부 도사 차마 못 듣겠는지 나졸들에게 손짓을 하려다 연산의 저지로 그만둔다.
장생
이 놈이 기생들의 요분질이 시시해지니
이번엔 남자하고 붙어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데.
연산, “남자하고 붙어먹는 짓”이라는 장생의 사설에 공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활을 당겨 장생을 겨눈다.
장생
그 비역질이 보통 비역질과 달라서,
밥이 나오고,
비단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인데!
연산 활을 쏜다.
장생, 날아오는 활을 슬쩍 피하며 재주를 계속한다.
연산, 다시 활을 겨눈다. 쏜다.
이번에도 장생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다.
세 번째 화살을 쏜다.
화살 끝이 줄을 때린다.
줄이 흔들리며 장생 떨어진다.
의금부 나졸들 장생에게 달려든다.
장생을 일으켜 세워 연산의 방 문 앞으로 끌고 간다.
연산 방안에 있는 칼을 빼들고 맨발로 문지방을 넘어선다.
연산, 장생 앞에서 칼을 높이 쳐든다.
연산
이 놈이!
하며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공길이 달려 나가 연산과 장생 사이로 나선다.
공길
(간곡하게)
마마.
어찌 왕의 손에 천하디 천한 저놈의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
연산, 공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공길
마마. 저 놈은 타고난 광댑니다.
저 놈에게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광대면 누구나 신명이 올라 놀다 죽길 바래요.
저 놈을 지금 죽이시면 그건 저 놈에게 형벌이
아니라 은혭니다.
장생
그래, 니가 나를 아는구나.
이제 광대도 뭣도 아닌 놈이 어찌 그걸 알고?
(연산을 향해)
저게 임금이야 망나니야.
천한 놈 하나 죽이는데 뭔 사설이 이리 길어?
쳐라.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놈이다. 쳐라!
연산 부르르 떨던 손을 내려놓는다.
연산
잃을 게 없어?
내 다시는 니놈이 광대짓을 못하게 해주지.
여봐라!
저 놈의 눈을 불로 지져라!
(jump)
불에 달궈진 시뻘건 인두가 장생의 눈에 다가간다.
장생 눈을 감고 동상처럼 앉아있다.
연산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본다.
공길,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눈으로 장생을 바라보다 끝내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연산 그런 공길을 본다.
장생의 눈이 지져진다.
긴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