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 : 두번 재, 起 : 일어날 기, 東 : 동녘 동, 山 : 메 산
풀이
동산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된다는 의미다.
유래
동진(東晉) 때 중엽에 사안(謝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의 하남성인 진군(陳郡)에서 태어난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해 젊었을 때부터 주위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명성은 어느덧 중앙에까지 알려져 조정에서는 몇 번이고 출사하기를 권했지만, 사안은 그때마다 ‘능력이 모자란다’,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 하는 등의 핑계를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누구나 바라는 입신출세를 그토록 마다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자고 나면 나라가 바뀌어 있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부침과 혼란이 극심한 시대였다. 삼국 시대에 이어 등장한 사마씨(司馬氏)의 진(晉)나라가 서기 316년에 겨우 4대 52년으로 멸망하자 그 왕족인 사마예(司馬睿)가 건업(建業)에 도읍을 정하고 한 도막 땅으로 동진을 세워 정통을 잇는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지만, 한쪽에서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강(羌) 등 변방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세운 전조(前趙), 후조(後趙), 성한(成漢), 전연(前燕), 후연(後燕), 전진(前秦), 후진(後秦) 등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땅덩이가 갈가리 찢어져서 서로 먹고 먹히는 싸움이 끊일 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안은 그런 세상에 관직에 나가 봐야 별로 볼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안이 은거한 곳은 회계군(會稽郡)의 동산(東山)이란 곳으로서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그는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와 친구가 되어 함께 산야를 누비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내가 뛰쳐일어나야 할 세상이 오리라.’
사안은 유유자적한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그런 포부를 품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나이 40살 때, 동진의 조정 실력자 환온(桓溫)이 간곡한 요청으로 그를 불러내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중앙 관직에 나간 사안은 사마(司馬)가 되었고, 9대 효무제(孝武帝)가 등극한 후에는 재상에 올라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당시 동진의 북쪽에는 티베트계의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이 큰 세력을 자랑하며 동진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사안은 아우 사석(謝石)과 조카 사현(謝玄)을 대장으로 삼아 동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드디어 서기 383년 전진이 대군을 동원하여 남쪽으로 쳐들어왔다. 그 바람에 누구나 벌벌 떨며 걱정했지만, 사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국정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사석, 사현, 유뢰지(劉牢之) 세 장수를 내보내며 적을 쳐부수도록 명했다.
동진군과 전진군은 비수(肥水) 근처에서 맞닥뜨려 치열한 일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는 동진군의 대승이었다. 그로써 전진의 남하 야망은 꺾이고 말았고, 동진은 사안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어 내친김에 황하 이북까지 밀고 올라가 영토를 훨씬 넓혔다. 이처럼 뒤늦긴 했어도 빛나는 사안의 입신출세 때문에 ‘재기동산’이란 말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