驢 : 당나귀 여, 鳴 : 울 명, 犬 : 개 견, 吠 : 개짖을 폐
풀이
당나귀가 울고 개가 짖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문장이나 논리가 졸렬할 때 비웃는 말이다.
유래
남북조 시대의 북위(北魏)에 온자승(溫子昇)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금의 산동성인 제음(濟陰) 출신으로, 원래 머리가 총명한 데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젊은 나이로 학문에 통달하고 식견이 높았다. 그렇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광양왕(廣陽王) 왕연(王淵)의 집에 들어가 식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자네 글줄이나 읽은 모양이니, 우리 집 하인의 애들에게 글을 좀 가르쳐 주지 그래.”
왕연이 온자승을 보고 한 말이었다. 신분만 귀할 뿐 사람 보는 눈은 형편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온자승은 마다하지 않고 하인의 애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쳤다. 한번은 당대의 저명한 문인인 상경(常景)이 왕연의 집에 왔다가 우연히 온자승이 쓴 문장을 보게 되었다.
“아니, 이 글을 누가 썼지요?”
“내 집에 식객으로 얹혀 있는 온자승이란 젊은이랍니다. 왜 그러시오?”
“난 일찍이 이런 탁월한 문장을 본 적이 없소. 참으로 대단한 문장이구려.”
그 말을 듣고 놀란 왕연은 비로소 온자승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어, 그때부터 그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서기 516년, 북위의 효명제(孝明帝)는 동평왕(東平王) 원광(元匡)에게 명하여 전국의 어질고 유능한 선비를 널리 뽑아 올려 등용하도록 했다. 이 특별 전형(銓衡)의 결과 800여 명의 참가자 가운데 23명이 등용의 영광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재로 꼽힌 인물이 바로 온자승이었다. 선발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하여 하나같이 결과를 승복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각자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처해진 원광은 온자승을 불러 말했다.
“그대가 저 사람들을 어떻게 좀 납득시켜 보도록 하게.”
온자승은 마다하지 않고 불만 가득한 낙천자들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는 탁월한 학식과 유창한 언변으로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답하는 한편, 위로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그 결과 모두들 자신의 재주가 온자승에게 미치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고는 얼굴이 붉어져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일로 온자승의 명성은 온 조정에 알려졌고, 불과 22살의 나이로 어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점점 벼슬이 높아가며 황제의 신임도 두터워져, 조정에서 작성하는 공식 문서라든지 칙서(勅書)는 거의 대부분 온자승의 손에 의해 작성될 정도였다. 온자승이 37살이던 531년, 발해왕(渤海王) 고환(高歡)이 정변을 일으켜 원랑(元朗)을 새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곧 경제(敬帝)다. 정권을 장악한 고환은 스스로 대승상이 되어 조정을 한손아귀에 넣었다.
“이런 대역무도한 놈 같으니! 용서할 수 없다.”
조정에서 일어난 정변에 누구보다 노발대발한 것은 병주(幷州) 자사 주조(朱兆)였다. 그는 즉시 정병 20만을 동원하여 고환을 치기 위해 출병했다. 이때 고환의 휘하에는 겨우 3만 병력밖에 없었으므로,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누가 보더라도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나 고환은 하남성의 한능산(韓陵山)을 의지하여 둥글게 진을 치고 필사불퇴의 각오로 맞섰다. 주장(主將)의 이런 태도는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였고, 싸움의 결과 병주군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재기불능의 참패를 당한 주조는 약간의 패잔병을 이끌고 자기 근거지인 병주를 향해 줄행랑을 놓았으나, 고환이 한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맹렬히 추격하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마침내 병란의 티끌이 가라앉고 평화가 오자, 경제는 승전과 아울러 고환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로 한능산에 정국사(定國寺)라는 절을 건립하고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그 기념비의 비문을 당대의 문장가로 알려진 온자승이 쓰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후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의 유명한 문인 유신(庾信)이 북위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정국사에 들렀다. 평소에 북방 사람들을 무식하고 야만적인 자들이라고 경멸해 온 유신이었으나, 빗돌에 새겨진 온자승의 비문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북외에도 이처럼 탁월한 문장가가 있었단 말인가!”
몹시 감탄한 유신은 그 비문을 그대로 베껴 썼다. 그런 다음 양나라로 돌아간 유신은 친구들이 북외에 글을 제대로 아는 선비가 있더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딱 한 사람 온자승이 있었네. 그가 쓴 한능산 비문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명문이었어. 그렇지만 다른 작자들의 목소리는 모두 ‘여명견폐’에 불과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