雁 : 기러기 안, 書 : 글 서
풀이
기러기 발에 묶어 먼 곳에 소식을 전하는 편지나 문서를 가리킨다.
유래
한(漢)나라 역대 황제들은 국내 문제 못지않게 변방 오랑캐 때문에 많은 고충을 겪어야 했다. 오랑캐들 중에서도 가장 힘든 상대가 흉노(匈奴)였는데, 그 흉노의 왕을 선우(單于)라 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모두 목축이나 사냥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금방 무서운 전사로 변해 사납고 날쌔기가 놀라울 정도였다. 이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져서 여타 오랑캐 부족들을 모두 굴복시켜 나름대로 그들 사회의 통일을 이룬 다음 남쪽의 한나라와 대등한 자격으로 맞서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양쪽 다 상당수의 포로를 억류하고 있었다.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인 소무(蘇武)가 국경을 넘어 흉노 땅으로 들어간 것은 포로 교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흉노는 내부 분열로 어수선했기 때문에 소무는 목적한 임무를 달성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항복하여 자기네 사회에 동화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외국 사절한테 이 무슨 무례한 대접인가. 우리 황제 폐하께서 아시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소무는 이렇게 항의하며 버티었으나, 무지막지한 그들에게 먹혀 들어갈 리가 만무하였다. 결국 사절단 모두 목숨이 아까워 흉노에게 항복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굴욕적인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소무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했다.
“나는 한나라 황제 폐하의 신하다. 그런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미개한 너희들에게 어떻게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화가 난 흉노의 선우는 소무를 황량한 산 속의 굴에 가두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소무는 눈을 녹여 물을 대신하고 가죽 담요를 찢어서 씹어 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했다.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선우는 소무를 다시 불러들여 물었다.
“그만하면 어리석은 고집을 버릴 때도 되었을 텐데. 너희 나라에서는 이미 너를 버린 지 오래다. 생각을 고쳐먹고 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떠냐?”
“그대야말로 어리석은 기대를 버리는 것이 좋겠구나. 나는 죽더라도 한나라 신하다.”
노발대발한 선우는 소무를 북쪽의 황량한 곳으로 추방해, 거기서 놓아 기르는 양떼를 돌보는 일을 시켰다. 그래도 소무는 고국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 혹독한 고생을 묵묵히 견뎌 냈다. 몇 년 후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대를 이었다.
그러고서도 6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한나라 조정은 흉노에 사신을 보내어 소무의 행적을 찾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흉노의 선우는 소무가 흉노 사람이 되어 살다가 벌써 오래 전에 죽었다고 둘러댔고, 한나라로서는 그 말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한나라 사신의 숙소에 몰래 찾아든 사람이 있었다. 흉노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 생김은 아무리 봐도 한나라 사람이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사신이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상혜(常惠)라 하고, 지난날 소무 장군을 따라왔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부득이 항복해 살고 있습니다.”
“그럼 소무 장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겠구나.”
“알다뿐이겠습니까. 장군은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갖은 박해를 받고, 지금은 북쪽으로 추방되어 양치기 노릇을 하고 계실 겁니다.”
사신은 깜짝 놀랐고, 소무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여 기뻤다.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흉노의 군왕이 소무 장군은 죽었다고 딱 잡아떼고 있으니 어쩐다?”
“그러면 내일 선우를 만나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상혜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는 사신에게 이러저러한 설명을 한 다음 서둘러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에 선우를 찾아간 사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사실은 전하의 체면을 생각해서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으나, 계속 그렇게 부인하시니 참았던 말을 부득이 해야겠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저희 황제께서는 사냥을 나가셨다가 기러기 한 마리를 쏘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에 쓴 소무 장군의 편지가 매어져 있었지요. 북쪽 황야 어딘가에서 방목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제가 ‘안서(雁書)’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씀드려도 계속 아니라고 우기실 작정이십니까?”
사신이 정확히 정곡을 찌르자, 선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더니 비로소 소무가 아직 살아 있다고 실토했다.
이윽고 며칠 후에 사신 앞에 나타난 소무의 모습은 본래의 그를 잘 아는 사신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머리는 자랄 대로 자란 데다 하얗게 새었고, 허리가 구부정했으며, 털가죽 옷은 남루하다 못해 금방 삭아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도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부절(符節)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장군,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도대체 이 어인 모습이십니까!”
“허허, 고생이야 뭐……. 황공하신 폐하의 은공으로 언젠가는 이런 날을 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소.”
소무와 사신은 손을 부여잡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무는 흉노에게 붙잡힌 지 거의 20년 만에 꿈 속에서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