罄 : 빌 경, 竹 : 대 죽, 書 : 글 서, 難 : 어려울 난
풀이
대나무 잎을 사용해 나쁜 행실을 기록하는데, 그 악행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기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유래
나라가 망하려면 어질고 유능한 임금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전한 마지막 황제인 평제(平帝)가 바로 그런 인물로, 그는 어지러워진 나라를 바로잡을 뜻도 힘도 없이 오로지 향락만 일삼았다.
‘이런 지경이면 내가 나서서 새 나라를 세운다 해도 백성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런 야심을 품은 자가 황실의 외척인 왕망(王莽)이었다. 그는 기회를 보다 황제를 독살하고 권력을 잡아 2∼3년간 전횡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이라 바꾸었다. 서기 8년, 그리하여 한(漢)이란 나라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권력을 잡았지만 정치를 제대로 해 나갔으면 뒤탈이 없었을 것인데, 왕망에게는 그 정도 헤아릴 수 있는 지모가 없었다.
‘이제 천하는 내 것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렇게 기고만장한 왕망은 한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왕전제(王田制)’라고 하여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해버렸다. 그러니 지주 계급의 원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상공업과 이자 제도를 개선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백성들을 들볶아 착취했으며, 네 번에 걸친 화폐 개혁으로 사유 재산을 모두 국고에 귀속시켜 백성들을 떼거지로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화찬란한 궁궐을 아홉 동이나 건립하는 바람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가혹한 노동으로 수없이 죽어 나갔고, 변방 국가를 상대로 공연한 전쟁을 일으켜 국력을 소모했다. 왕망의 악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달하자, 감연히 일어선 사람이 서주(西州) 사람 외효(隗囂)였다.
“왕망의 ‘죄는 너무 많아 초(楚)와 월(越)의 대나무를 다 사용해 적어’도 남을 정도다!”
외효는 사방에 보내는 격문에다 이렇게 썼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죽간(竹簡)이라 하여 대나무를 쪼개 기록판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참고 견디던 농민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반란에 가담했다. 마침내 농민군은 성도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여 왕망을 잡아 죽였고, 유수(劉秀)를 황제로 옹립한 새 한나라인 후한(後漢)이 탄생했다.